지난 2월 초 교육부는 ‘한글 전용’ 에서 ‘한글.한자혼용’ 으로 한글정책을 전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바로 ‘한글. 한자 병용’으로 전환한다고 재수정 하여 발표했다. 문화관광부는 이러한 한글정책의 대전환이 국가의 중대문제라고 생각되지 않았는지 행정자치부와 교육부 등 관련 부처간에 의견조율도 없이 전격적인 발표를 한 것이다. 문화관광부의 주장은 한글정책이 바뀔 경우 여론의 반대가 클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여론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밀어부치겠다는 것인가?

사건의 뒤에는 한자세대의 입김이 있었을 것이다. 총리실은 문화관광부의 한자병용 방침은 청와대와 사전에 조율 된 것이고 문화부가 느닷없이 한자병용 방침을 발표한 것은 아닐 것이라고 설명을 했다. 결국, 진원지는 청와대? 급기야 김종필 총리는 고전과 전통을 이해하는데 최소한의 한자 이해가 필요하다는 김대중 대통령의 의지가 감안됐을 것이라는 추측과 함께 ‘한글도 우리말이며 한자도 우리 글인데 혼용이 왜 문제가 되느냐’ 며 한자병용을 찬성했다.

이러한 정부정책에 대해 집권여당인 국민회의는 반대입장을 냈다. 2월 22일 총재단 회의에서 ‘한자병용정책의 동기가 일본과 중국 관광객의 편의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면 유럽의 선진국들처럼 관광객이 많은 곳에 (한자로) 안내문과 표지문을 세우면 될 것인데 이를 마치 어문정책의 변화인 것처럼 몰고 가는 바람에 젊은 층의 반발을 사고 정부의 신뢰성을 떨어뜨렸다는 비판론이 제기됐다. 한자병용정책은 정부 내 협의나 당과의 협의도 없었다. 어떤 정책이든 결정 전 민의를 충분히 수렴하는 민주적인 정책결정과정을 거쳐야 한다.’ 대략 이러한 비판이었다. 그러면 한자병용정책은 한자와 한문고사성어를 즐겨하는 김대통령과 김총리의 합작품?

지난 2월 11일 매일경제신문에는 김효근 이화여대 경영학과 교수의 흥미있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는 신지식인중의 한 사람이다.) 기사제목은 “신지식인 보고서와 한자병용” 으로 김교수는 자신이 원래 한글 전용론자 였는데 1년간 신지식인 보고서를 준비하면서 한자교육 부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우리국민이 고부가가치형 신지식인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한자교육이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지식은 사물지, 사실지, 방법지의 세가지로 분류되는데, 가치창출의 핵심이 되는 방법지를 위해서는 사물지나 사실지의 기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물지란 책상이나 의자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나 자유, 정의와 같은 개념적 실체를 아는 지식을 말한다. 사실지란 ‘물은 수소와 산소로 이루어졌다’ ‘대한민국의 광복일은 1945년 8월15일이다’ 처럼 사물지의 조합으로 만들어진 지식을 의미한다. 방법지는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지식을 말하며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가로 가치가 창출된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이러한 세 가지 종류의 지식이 상호작용 함으로써 인간의 지식과 가치창출에 기여하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지를 많이 아는 것이 결국 사실지와 방법지를 고도화 하는 데 유리하다는 것이다. 김교수는 상형문자인 한자는 당연히 표음문자인 한글보다 사물지를 표현하는데 유리하다고 한다. 즉, 상형문자인 한자는 각 글자가 고유의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조합하여 단어를 만들면 단어의 뜻이 명확하여 이해하고 기억하기 쉽다. 그래서 한자는 그 자체가 사물지이기 때문에 지식기반사회에서는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세계화 국제경쟁시대에 때 아니게 불거져 나온 한자사용논쟁. 이에 대한 찬반논쟁은 김대통령이나 김총리의 감상적인 입장보다는 문화관광부의 외국관광객 유치, 김교수의 신지식인 형성이라는 국제경쟁의 입장에서 설명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민에서 설득되어져 공감대가 형성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나는 당연히 반대하는 입장에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한자세대는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한글전용 한자혼용 또는 한자병용의 문제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대중이 배워서 사용하는데 가장 편하고 효율적인 것을 정한다는 점에서 국민이 판단할 사항이다. 정부가 여론을 무시 또는 알지도 못한 채 일부 집권층의 사견을 토대로 일방적으로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과거 왕정체제나 독재에서나 가능했던 일이다. 이번 정부의 정책결정과정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대중의 반대가 있을 것을 예상했고, 국민의 뜻이 반드시 국가를 위해 현명한 판단일 수는 없기 때문에 정부의 일부 엘리트가 용단을 내린 정부정책 이었다고 이해하면 되는 것인가? 천리안이 2월10일부터 실시중인 한자병용 찬반투표에서는 반대가 찬성보다 3대1 정도로 훨씬 많았다고 한다.

김교수는 위에서 한자병용을 지지하면서 암묵지, 사물지, 사실지, 방법지 등 여러 새로운 전문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용어의 정의는 간결하고 명확해야 하는데 한자로는 이것이 가능하지만 한글로는 불편하다는 것이다. 즉, 위의 단어들은 원래 외국어를 번역한 것인데 한자번역은 쉬운데 반해 한글번역은 은 어렵기 때문에 한자로 번역된 것이고 따라서 한글.한자를 병행하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과연 외국어를 한글로 번역하여 정의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가? 한글로 풀어 쓰면 글자수가 한문보다 약간 더 많아 지는데 이것이 그렇게 불편하다는 말인가?

한자병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가 대부분 한자어로 되어 있음을 그 근거로 삼고 있다. 즉, 한자가 실생활에서 쓰이고 있는 만큼 기본적인 한자는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선물(先物)거래소를 선물(膳物)거래소로 알아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다. 표음문자건 표의문자건 단어의 뜻은 문장을 형성하여 그 문맥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한문세대들은 과거 한자를 배울 때 하나하나의 글자를 암기해야 했고 글자를 조합하는 것에 따라 단어의 뜻이 달라지기 때문에 한문시간에 한문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중국이 발전하기 어려운 이유중의 하나를 한자교육의 어려움으로 설명하는 학자들도 많다. 만일, 우리국민의 일부가 그 어려운 900자 또는1800자 한자를 외우고 그 해석방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이것이 또한 언어소외계층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그들은 신지식인의 대열에서 탈락할 수 밖에 없는 운명인지?

오히려 지금의 상황에서 개선책을 찾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예컨대,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국어사전을 현 세대에 맞게 개정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위에서 예로 들은 ‘선물’ 은 국어사전을 보면 선물(先物), 선물(膳物)로 따로 설명하고 있다. 이를 일반적인 표음언어사전처럼 ‘선물’ 이라는 단어설명에 ①선물(先物) ②선물(膳物) 에 대한 설명 (자세하게 예도 들어가면서) 을 하는 식으로 한글세대에 맞는 한글사전으로 만들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 차이가 한글세대에 주는 의미는 대단할 것이다. 전자는 (이 경우도 한글세대는 前者로 이해하지 일부 지식인들이 우려하는 것 처럼 電子 또는 電磁로 이해하지 않을 것이다) 선물의 단어가 2개인 것으로 보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선물이라는 단어에 여러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사전을 수시로 찾아 보듯이 (현지인들도 수시로 사전을 참고함) 한글사전을 찾아보는 것은 극히 당연한 것이다. 사실, 우리처럼 사전을 찾아보지 않는 국민이 또 있을까? (왜냐하면 한자어는 단어자체가 해석적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사전이 필요하지 않음.) 언어는 사회의 필요성에 따라 계속하여 발전하여 나가는 것이다. 비록, 한글의 대부분의 단어가 한자어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해서 그리고 아직도 한자세대가 많다고 해서 한자위주로 단어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본다. 사실 한글도 바람, 밝다, 눈부시다, 부수다 등 처럼 의미있는 단어가 많아 노력하기에 따라 한자의 도움 없이도 외우기 쉽고 이해하기 쉽고 뜻이 명확한 아름다운 한글을 발전시킬 수가 있다. 한글의 단어가 많이 개발되지 않았던 것은 한글이 미개한 글 이래서가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한문학의 영향이 아니었던가?

세계글자의 추세는 어려운 글자에서 쉬운 글자로 흘러가고 있다. 그 많은 언어 중에서 여러 다양한 민족이 사용하는 언어는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처럼 표음언어인 것이다. 배우기 어려운 언어는 국제화될 수 없다. 한글의 국제화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큰 과제인 것이다. 한글의 국제화는 이민족의 외국인이 배우는 것도 생각할 수 있지만 당장에 중요한 것은 해외한국인들에 대한 한국어 교육이 될 것이다. 재외동포재단 (http://www.okf.or.kr)의 통계에 따르면 해외동포는 97년 현재 총 5백5십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이들은 전세계에 퍼져 나가 있는 한국의 국력인 것이다. 이들 한국인 후예들에게 한자병용을 강요할 것인가? 불과 얼마 전 정부가 세계화를 선언하기 전만 하더라도 이들 해외지식인들은 한국의 직장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여러이유중 한자사용이 이들의 적응을 어렵게 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신문은 한자를 혼용하여 읽기 어렵게 했고 직장에서도 한자어가 난무했었다. 이제 상당수의 해외지식인들이 한국에서 그리고 해외에서 한국과 일을 하고 있다. 이들을 상대로 다시 쇄국정책을 선언할 것인가? 또한, 북한에 있는 우리동포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아내는 한자세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책을 읽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번 한자병용 정책에 대해 말했더니 한마디로 “그러면 한자 좋아하는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 살면 되겠네” 라고 쉽게 대답하더라.